지난 5월과 6월, 마진배언덕에는 붉은 양귀비 물결로 마음을 설레이게 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던
꽃잎은 많은 추억이 되었고, 언덕은 다시 조용함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꽃이 사라졌다고 해서 언덕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가을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축제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메리골드입니다.양귀비도 척박한 땅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강인한 식물이지만, 메리골드를 가까이에서 키워보면
그 생명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비탈진 언덕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던 줄기가 장마철 거센 비바람에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타까운 마음들지만, 며칠 뒤 다시 바라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땅에 닿은 줄기에서 새로운 뿌리가 내려 더욱 힘센 생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마저 새로운 시작으로 바꾸는 꽃.
그래서 메리골드를 바라보고 있으면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반드시 끝이 아니라, 더 단단해지고 더 아름답게 피어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가을 바람에 떨어진 작은 씨앗들은 긴 겨울을 차가운 땅속에서 지내다가 봄이 오면 양귀비가 화려하게 피어나는 그 언덕 아래에서 조용히 싹을 틔웁니다. 양귀비의 붉은 꽃들 사이에 숨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씨를 뿌렸겠거니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지난해 자연이 남겨 놓은 선물입니다.
7월이 시작되면 별도로 씨앗을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하나둘 메리골드가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여름 햇살 아래 첫 꽃을 피우기 시작한 메리골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풍성해지고, 7월부터 첫서리가 내리는 12월까지 무려 다섯 달 가까이 언덕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긴 축제를 이어갑니다.
봄의 양귀비 축제가 짧고 강렬한 감동이라면, 메리골드 축제는 긴 시간 동안 천천히 깊어지는 아름다움을 선물합니다.
메리골드는 화려한 꽃도, 짙은 향기를 가진 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수없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긴 계절을 묵묵히 견디며 꽃을 피워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왜 사람들은 메리골드의 꽃말을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견디며 다시 피어나는 작은 용기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메리골드는 조용히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진배언덕에는 꽃보다 푸른 잎과 황토흙이 더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황토와 초록빛 속에는
이미 가을의 황금빛 풍경이 자라고 있습니다.
장마를 견딘 메리골드는 더욱 풍성하게 피어나고, 그 꽃들은 다시 수많은 씨앗을 남기며 내년의 봄과 가을을 준비합니다.
계절은 반복되지만 자연은 결코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붉은 양귀비가 봄날의 설렘으로 가슴을 뛰게 했다면, 황금빛 메리골드는 긴 계절을 지나며 마음속에 잔잔한 온기를 남겨 줍니다. 비바람에 쓰러져도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장마와 무더위를 견뎌 서리가 내리는 날까지 꽃을 피워내는 메리골드의 모습은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메시지입니다. 올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이어지는 마진배언덕의 메리골드 축제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계절이 빚어낸 황금빛 풍경 속에서 희망과 생명의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